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 어떤 생수를 쓰느냐가 맛을 바꾼다는 말, 처음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습니다. 원두나 그라인딩이 커피 맛을 결정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물이 변수라는 건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커피는 99%가 물로 이뤄진 음료입니다. 오히려 물을 신경 쓰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죠.

커피 맛이 달라진다고? 물이 변수가 되는 이유
어디선가 "생수 종류에 따라 커피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속으로 그게 정말일까 싶었습니다. 평창수랑 삼다수를 놓고 물 맛을 구분할 자신도 없는데, 그 차이가 커피 한 잔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게 잘 와닿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커피 추출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커피는 분쇄된 원두에서 성분을 '녹여내는' 과정입니다. 무언가를 녹이는 용매가 물이라면, 그 물의 상태가 얼마나 잘 녹이느냐를 결정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전문 용어로는 이를 용해도(solubility)라고 합니다. 여기서 용해도란 특정 조건에서 물질이 물에 녹아 들어갈 수 있는 최대량을 뜻하며, 물의 성질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실제로 커피 업계에서는 SCA(Specialty Coffee Association), 즉 스페셜티 커피 협회가 추출에 적합한 물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출처: SCA). TDS 기준 75~250 ppm, pH는 6.5~7.5를 권장 범위로 두고 있는데, 이 수치를 처음 봤을 때는 커피 한 잔에 이렇게까지 규격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습니다.
TDS와 pH, 두 숫자가 커피 맛을 가른다
물을 측정하는 핵심 지표는 두 가지입니다. TDS와 pH입니다.
먼저 TDS(Total Dissolved Solids)는 총용존고형물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물 안에 녹아 있는 미네랄과 각종 성분의 총량을 ppm(parts per million) 단위로 나타낸 수치입니다. TDS가 낮은 연수(50 ppm 이하)는 커피 성분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기는 반면, TDS가 높은 경수(150 ppm 이상)는 이미 미네랄로 채워져 있어 커피 성분이 충분히 녹아들 여지가 줄어듭니다.
흥미로운 건 물의 TDS 수치가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부산 지역의 경우 겨울에는 160 ppm을 넘는 약경수를 보이다가 여름 장마철에는 70~80 ppm대의 연수 계열로 바뀐다고 합니다. 같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인데 계절마다 커피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죠. 제가 직접 써봤을 때도 여름과 겨울의 커피 맛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느꼈는데, 그 원인을 TDS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게 꽤 납득이 됐습니다.
두 번째는 pH(수소이온농도)입니다. pH란 물이 산성인지 염기성인지를 0~14 사이의 숫자로 나타낸 지표로, 7이 중성, 7 미만은 산성, 7 초과는 염기성입니다. pH가 낮아 산성에 가까울수록 커피 성분이 잘 녹지 않아 맛이 도드라지고 날카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pH가 높은 염기성 물은 용해도가 높아 커피 성분이 고르게 녹아 나오는데, 이 때문에 라이트 로스팅처럼 성분 추출이 까다로운 커피에는 pH가 다소 높은 물이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ICS 8.0, 평창수, 삼다수 등 시중에 유통되는 생수마다 pH 수치가 제각각입니다. 같은 브랜드 생수라도 취수 날짜나 로트(lot)에 따라 수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브랜드를 고정해 두더라도 맛이 미묘하게 흔들린다고 느꼈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물의 컨디션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수일 때 추출 세팅을 어떻게 바꾸나
TDS 수치에 따라 추출 변수를 조정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 연수(50 ppm 이하): 커피 성분이 잘 추출되므로 도징량과 비율을 표준에 가깝게 유지합니다.
- 경수(150 ppm 이상): 성분이 덜 녹아나올 수 있으므로 추출 비율을 높이거나 도징량을 줄여 밸런스를 맞춥니다.
- pH 낮은 산성 물: 분쇄도를 조금 더 가늘게 하거나 물 온도를 높여 추출을 보완합니다.
- pH 높은 염기성 물: 라이트 로스팅 원두와 궁합이 좋으며, 불필요한 성분까지 녹아날 수 있어 추출 시간을 짧게 조절합니다.

측정 도구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물 실험
TDS 미터와 pH 미터를 구비하려면 합산 15만 원 안팎의 비용이 필요합니다. 저도 아직 측정 기구를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홈 바리스타로서 그 선을 넘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그런데 측정 도구가 없어도 지금 당장 해볼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같은 원두, 같은 레시피로 생수 종류만 바꿔보는 겁니다. 삼다수로 내린 핸드드립과 평창수로 내린 핸드드립을 나란히 놓고 마셔보는 거죠. 이렇게 하면 측정 수치 없이도 몸으로 차이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솔직히 처음엔 큰 차이를 못 느꼈습니다. 그런데 같은 날 연달아 두 잔을 비교하니 산미의 선명함이나 바디감이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소비자원이 국내 생수 브랜드의 미네랄 성분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제주삼다수의 TDS는 약 30~40 ppm 수준으로 연수 계열에 속하고, 평창수는 상대적으로 미네랄 함량이 높은 편입니다(출처: 한국소비자원). 이 차이가 실제 커피 맛에 영향을 준다는 걸 알고 나면 생수 선택이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님을 실감하게 됩니다.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카페들이 물을 예민하게 다루는 이유도 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물에서부터 추출 변수를 통제하는 것, 그것이 한 잔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출발점입니다. 데이터를 꾸준히 쌓고 추출에 반영하는 작업은 어렵지만, 그 디테일이 결국 커피의 맛을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커피 내릴 때 수돗물 써도 괜찮을까요?
A. 수돗물은 지역마다 TDS 수치와 염소 처리 정도가 달라 맛의 편차가 큽니다. 정수 필터를 거친 수돗물이라면 사용할 수 있지만, 동일한 조건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맛의 일관성을 원한다면 TDS 수치가 알려진 생수를 선택하는 편이 유리합니다.
Q. 삼다수랑 평창수 중에 커피에 더 잘 맞는 게 있나요?
A. 어느 쪽이 무조건 낫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삼다수는 TDS가 낮은 연수 계열로 커피 성분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고, 평창수는 미네랄 함량이 상대적으로 높아 바디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용하는 원두의 로스팅 정도와 추출 방식에 따라 궁합이 달라지므로, 직접 비교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Q. TDS 미터는 꼭 사야 하나요? 대체 방법은 없을까요?
A. 시작 단계에서는 생수 라벨에 표기된 미네랄 함량을 참고하는 것으로도 대략의 TDS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같은 브랜드라도 취수 날짜에 따라 수치가 달라질 수 있어 정확한 관리를 원한다면 결국 측정 기구가 필요합니다. 일단은 생수 종류를 바꾸며 맛을 비교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는 게 현실적입니다.
Q. 라이트 로스팅 커피에는 어떤 물이 좋은가요?
A. 라이트 로스팅은 성분 추출이 까다로운 편이라 용해도가 높은 pH 7 이상의 약염기성 물이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pH가 지나치게 높으면 원하지 않는 성분까지 함께 녹아나올 수 있으니, 추출 시간과 분쇄도를 함께 조절하면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물이 커피 맛에 이렇게까지 영향을 준다는 사실, 저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TDS와 pH라는 두 가지 수치를 이해하고 나니, 그동안 맛이 흔들렸던 원인 중 상당 부분이 물에 있었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측정 기구를 구입하기 부담스럽다면, 오늘 당장 집에 있는 생수를 바꿔보는 것만으로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생수를 두 종류 준비해 같은 레시피로 내려 비교해보고, 데이터가 쌓이면 그때 측정 도구를 더해가는 방식이 현실적으로 맞는 것 같습니다. 커피 한 잔의 완성도는 결국 이런 작은 변수 하나하나를 얼마나 진지하게 바라보느냐에서 갈린다고 생각합니다.